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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반대자들에 의해 경멸과 외국인 혐오가 담긴 별명인 "오스트리아인"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명칭은 그녀의 유산 중 일부만을 반영합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로트링겐의 프란츠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가 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로트링겐 출신이자 오스트리아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역사는 "로트링겐 출신"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을 기억하는 걸까요?

로트링겐의 프란츠: 황제가 된 공작

로트링겐과 바르의 공작 레오폴트의 아들인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1708-1765)은 1736년 복잡한 외교 협상의 일환으로 자신의 공작령인 로트링겐과 바르를 루이 15세의 장인인 스타니스와 레슈친스키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그는 합스부르크 영토의 상속자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했습니다.

1745년 프란츠는 프란츠 1세라는 이름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결합은 1755년에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해 열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두 유산 사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조세파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은 이름 자체에 아버지 쪽 혈통의 이중 기원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의 대공녀인 반면, 아버지는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던 로트링겐 공작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1766년 스타니스와 사후 프랑스에 양도된 로트링겐은 유럽의 상상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유지했습니다. 로트링겐 공작들은 신성 로마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도 오래되고 복잡했습니다.

왜 "오스트리아인"이고 "로트링겐 출신"이 아닌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로트링겐 출신"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으로 불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정치적 맥락: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0년 미래의 루이 16세와의 결혼으로 확립된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을 상징했습니다. 프랑스인들에게 그녀는 주로 오스트리아 권력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익을 대표했습니다.

2. 혁명 선전: 혁명가들은 그녀의 외국 출신임을 강조하여 여왕을 실추시키려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인"이라는 별명이 "로트링겐 출신"보다 더 외국인 같고 위협적으로 들렸는데, 특히 로트링겐이 이제 프랑스 영토였기 때문입니다.

3. 모계 정체성: 유럽 궁정에서는 특히 여성의 경우 정체성이 모계 혈통을 통해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주로 오스트리아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었습니다.

4. 로트링겐의 망각: 1766년 로트링겐이 프랑스 영토가 되면서, 프란츠 1세의 로트링겐 유산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권력에 비해 기억 속에 덜 남았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로트링겐 유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충분히 "로트링겐 출신"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뤼네빌에서 자랐고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에 깊은 애착을 유지했습니다. 로트링겐 가문은 10세기부터 이어져 온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명망 있는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 로트링겐 유산은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그녀의 오스트리아 정체성과 프랑스의 마지막 여왕으로서의 비극적 운명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 이중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그녀의 정체성과 당시 왕조의 이해관계의 복잡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역사는 "오스트리아인"을 기억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혈통과 유산을 통해 로트링겐의 공주이기도 했습니다.

📖 Just-Jean-Étienne Roy의 "프랑스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의 역사"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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